침잠의 시간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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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듀라터치 작성일24-02-06 02:41 조회1,10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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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5일
내안에 존재하는 하느님, 나의 일부인 하느님, 매순간 지금 여기 계시는 하느님
먼 하늘에 계신게 아니고 지금 바로 지켜보고 계신 하느님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사건)을 바라보고 있다면 하느님은 지금 바라보는 시각이 맞다고 응원해 주실까?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 태도는 지금 내안에 계신 하느님의 시각으로 볼 때 어떨까?
나의 언어, 생각, 행동에서 지금 여기 내안에 계신 하느님의 존재속에서 나오는 것일까?
하느님을 의식하며 깨어있는 시간은 아주 짧고 에고의 놀이에 놀아나며 나이기를
전투처럼 드러내고 있다.
잘랐다고 말하고 싶고 내가 누군데 더욱 알아달라고 말하며
감정놀이에 에너지 쓰며 이러는 내가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의 신성따라 산다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을 알게 해주는 대립물이 두려움이라고 했다
내안에 존재하는 하느님, 그일부가 내안에 계심을 안다면 감정의 소용돌이 - 두려움의 존재는 줄어들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길을 걸을때, 직장에서 누군가가 나를 화나게 할때---내안에 하느님 즉 사랑을 깨우자.
그사랑은 하느님 닮은, 일부의 하느님이 나임을 알아차릴때 가능하다.
그안에 있을때 무한한 생명으로 채워주는 사랑에너지, 그안으로 들어가자.
오늘은 시작하자 일속에서 바로 그반대 대립물 에너지속으로 나를 내동댕이 쳤다.
연습을 하자! 의식하자 ! 의식하는 것은 깨어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나,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따르고자하는, 그모습을 더욱 닮아 삶으로 살아내는 나이길 바라는
주님닮은 나
2.6 02:41에
가끔 내가 지닌 주님의 속성을 토해내고 싶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의미있음을 표현하고 싶다.
이러한 생각은 시공간을 넘어 영원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어떤 모습이든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 하느님의 창작물이라는 사실이
나의 의미를 귀하고 대견하게 여기게 된다.
잠자는 생각들이 번득인다.
시간의 흐름속에 나이듦에 맡겨버리고 의식 없이 보냈던 시간 들에서
다시 존재의미를, 살아있음을 인식한다
2.6 02:51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문화, 예술이 있다.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춘 것이 여행이라했는데...
어디서나 삶의 형태는 비슷하다.
볼거리와 먹거리와 인간
그리고 스토리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고
고요속에 평화를 지니고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본다.
잠시라도 놓치면 여러 페르소나의 모습으로 에고는 춤을 춘다.
사랑에너지, 완벽한 신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엔
대립물이 너무 강하다.
사랑에너지속에서 사랑을 유지하기는 쉽다.
대립물속에서 사랑에너지l, 신성을 발휘하기엔 아주 작은 나를 발견한다.
이 놀이에서 제 3의 눈으로 제3의 관찰자로 바라보기엔
무엇을 놓고 달관해야하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좋은 거구나를 알고 흔들리지 않기에는
그곳에 있는 나에게 다가오는 무게는 크다.
연습이 필요하다.
완전함을 알려주기에 대립물이 필요한
그래서 이상황이 표출되는
그안에서의 평화를 바라보자.
2.16.
봉사는 하느님의 부르심인가?
일과 봉사 그리고 그안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
그것을 감당하면서 해내야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도망가고 싶다.
나에게 그역활이 오자 않았으면 좋았다.
내안에 계신 하느님을, 하느님 닮은 나를 깨우고 드러내라고
그러기위해 너의 속성은 버리라고
자존심, 드러맴, 잘람 그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느님 만이 나의 하느님
나에게의 질문?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모든것이 틀렸다면 어떻게 되는가?
" 나는 너희가 나한테 너희의 진리를 말하는 짓을 그만 둘 때까지는 내 진리를 말하수 없다"
" 네 느낌에 귀를 기울려라 '네 가장 고귀한 생각들'에 귀를 기울려라. 네 체험에 귀를 기울려라. 이중 어느 하나라도 네 선생들이 말한 바나 네가 책에서 읽은 바와 다르다면 그말들을 잊어버려라.
말이란 건 가장 믿음직스럽지 못한 진리 조달업자다.
내가 옳다고 말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 말이 기분 나쁘다고
2.16 .7:01
나의 태도는 평화와 따뜻함, 그리고 사랑이 있는 양성담당
7:03 지원자, 입회 청원자 면담을 생각하며
내안에 존재하는 하느님, 나의 일부인 하느님, 매순간 지금 여기 계시는 하느님
먼 하늘에 계신게 아니고 지금 바로 지켜보고 계신 하느님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사건)을 바라보고 있다면 하느님은 지금 바라보는 시각이 맞다고 응원해 주실까?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 태도는 지금 내안에 계신 하느님의 시각으로 볼 때 어떨까?
나의 언어, 생각, 행동에서 지금 여기 내안에 계신 하느님의 존재속에서 나오는 것일까?
하느님을 의식하며 깨어있는 시간은 아주 짧고 에고의 놀이에 놀아나며 나이기를
전투처럼 드러내고 있다.
잘랐다고 말하고 싶고 내가 누군데 더욱 알아달라고 말하며
감정놀이에 에너지 쓰며 이러는 내가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의 신성따라 산다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을 알게 해주는 대립물이 두려움이라고 했다
내안에 존재하는 하느님, 그일부가 내안에 계심을 안다면 감정의 소용돌이 - 두려움의 존재는 줄어들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길을 걸을때, 직장에서 누군가가 나를 화나게 할때---내안에 하느님 즉 사랑을 깨우자.
그사랑은 하느님 닮은, 일부의 하느님이 나임을 알아차릴때 가능하다.
그안에 있을때 무한한 생명으로 채워주는 사랑에너지, 그안으로 들어가자.
오늘은 시작하자 일속에서 바로 그반대 대립물 에너지속으로 나를 내동댕이 쳤다.
연습을 하자! 의식하자 ! 의식하는 것은 깨어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나,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따르고자하는, 그모습을 더욱 닮아 삶으로 살아내는 나이길 바라는
주님닮은 나
2.6 02:41에
가끔 내가 지닌 주님의 속성을 토해내고 싶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의미있음을 표현하고 싶다.
이러한 생각은 시공간을 넘어 영원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어떤 모습이든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 하느님의 창작물이라는 사실이
나의 의미를 귀하고 대견하게 여기게 된다.
잠자는 생각들이 번득인다.
시간의 흐름속에 나이듦에 맡겨버리고 의식 없이 보냈던 시간 들에서
다시 존재의미를, 살아있음을 인식한다
2.6 02:51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문화, 예술이 있다.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춘 것이 여행이라했는데...
어디서나 삶의 형태는 비슷하다.
볼거리와 먹거리와 인간
그리고 스토리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고
고요속에 평화를 지니고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본다.
잠시라도 놓치면 여러 페르소나의 모습으로 에고는 춤을 춘다.
사랑에너지, 완벽한 신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엔
대립물이 너무 강하다.
사랑에너지속에서 사랑을 유지하기는 쉽다.
대립물속에서 사랑에너지l, 신성을 발휘하기엔 아주 작은 나를 발견한다.
이 놀이에서 제 3의 눈으로 제3의 관찰자로 바라보기엔
무엇을 놓고 달관해야하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좋은 거구나를 알고 흔들리지 않기에는
그곳에 있는 나에게 다가오는 무게는 크다.
연습이 필요하다.
완전함을 알려주기에 대립물이 필요한
그래서 이상황이 표출되는
그안에서의 평화를 바라보자.
2.16.
봉사는 하느님의 부르심인가?
일과 봉사 그리고 그안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
그것을 감당하면서 해내야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도망가고 싶다.
나에게 그역활이 오자 않았으면 좋았다.
내안에 계신 하느님을, 하느님 닮은 나를 깨우고 드러내라고
그러기위해 너의 속성은 버리라고
자존심, 드러맴, 잘람 그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느님 만이 나의 하느님
나에게의 질문?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모든것이 틀렸다면 어떻게 되는가?
" 나는 너희가 나한테 너희의 진리를 말하는 짓을 그만 둘 때까지는 내 진리를 말하수 없다"
" 네 느낌에 귀를 기울려라 '네 가장 고귀한 생각들'에 귀를 기울려라. 네 체험에 귀를 기울려라. 이중 어느 하나라도 네 선생들이 말한 바나 네가 책에서 읽은 바와 다르다면 그말들을 잊어버려라.
말이란 건 가장 믿음직스럽지 못한 진리 조달업자다.
내가 옳다고 말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 말이 기분 나쁘다고
2.16 .7:01
나의 태도는 평화와 따뜻함, 그리고 사랑이 있는 양성담당
7:03 지원자, 입회 청원자 면담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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